(사)김유정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한국수력원자력(주)한강수력본부와 김유정문학상운영위원회가
공동 주관하는, 2007년부터 시작된, 한국문단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 중 하나입니다.
문예지 및 단행본을 통해 발표된 중·단편 소설을 대상으로 심사하여 매년 1회 시상하고 있으며,
김유정 소설의 문학사적 가치 전승과 한국소설문학의 새 지평 열기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2016(제10회) 김유정문학상 본심 심사평
2016년 제 10회 김유정 문학상 본심은 총 21편의 작품을 대상으로 진행되었으며, 개별 작품들에 대한 검토를 거쳐 다시 5편의 작품을 선별하였다. 해당 작품은 권여선의 「역광」, 박형서의 「거기 있나요」, 윤성희의 「스위치」, 조해진의 「문주」, 한유주의 「그해 여름 우리는」(저자 이름의 가나다 순)이다. 글쓰기와 유령의 발생학, 인류의 진화와 정치적 무의식, 구별과 구획의 현상학, 입양아 귀향과 이름의 의미론, 젊은 세대의 고통스러운 언어 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을 읽어가는 과정은 심사의 의무를 잠시나마 잊게 만들 정도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본심 심사위원들은 세밀한 토론을 거쳐 박형서의 「거기 있나요」를 제 10회 김유정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박형서의 소설 「거기 있나요」는 양자물리학에 근거한 독특한 상상력이 발휘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진화동기재현연구>라는 실험이 이루어진다. 진화동기재현연구는 인류의 진화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는지를 양자역학적 공간에서 재현(시뮬레이션)하는 것이다. 따라서 두 부류의 주인공이 등장하게 되는데, 하나는 실험을 진행하는 연구원 ‘광조교’이고 다른 하나는 양자역학적 공간에서 운동하는 쿼크(입자)이다. 실험을 통해 서식처가 정해지고 태양이 비추게 되자 진화의 방아쇠가 당겨진다. 돌연변이, 광합성, 염색체 전이가 나타나고, 쿼크들 사이에서 사회가 탄생하고, 종(種)들 사이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집단적인 동족 살해가 발생한다. 또한 언어가 생겨나 사회의 안정성이 확보되고 형벌체제를 통해 계급구조가 유지된다. 이 과정에서 연구진들은 실험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실험기간을 맞추기 위해 쿼크에게 주어지는 햇빛의 양을 조작하기 시작한다. 이후 쿼크들은 음성기호를 탄생시키고 감정의 발명으로까지 나아간다. 쿼크들의 진화를 지켜보는 과정에서 광조교의 욕망 또한 진화하게 되는데, 그의 권력의지는 실험을 위한 관찰을 넘어서 쿼크들에 대한 감시와 처벌로 나아가고 다시 광기어린 폭력으로 진화한다. 쿼크들의 저항 또한 진화를 하게 된다. 그들은 광조교의 폭력에 의해 죽어가면서도 끊임없이 저항의 방식들을 만들어 간다. 결국 실험은 실패로 돌아가고, 쿼크들의 미시우주는 파괴되었다. 쿼크들은 절멸되는 순간까지도 “이봐요. 거기 있나요?”라는 문장을 서로 주고 받았음이 이후에 알려진다.
「거기 있나요」는 물리학의 용어들이 쉴새없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단순히 과학소설의 문법이나 양자물리학의 지식을 현학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소설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억압과 저항의 공진화(coevolution) 과정을 재현하면서, 겨우 존재하는 것들의 숭고함 또는 존재에 근거한 정치적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탐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난해한 물리학 용어들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작가의 문제의식에 의해 충분히 맥락화되어 있어서, 일정 수준 이상의 문학적 가독성을 확보하고 있는 작품이다. 본심 심사위원들은 「거기 있나요」에 투영된 작가의 역량과 문제의식이, 종전의 한국문학에서 친숙하게 다루어졌던 주제들 너머로, 한국문학의 가능성을 확장하고 있다는 데에 의견을 모을 수 있었다. 낯설고 난해한 물리학 용어들에 의해 가려지지 않는, 작가의 문제의식은 오늘날 한국사회와 한국문학이 공들여 음미할 가치가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쿼크들의 말을 빌려서 축하의 말씀을 대신하고자 한다. “이봐요. 거기 있나요?”
- 오정희(소설가), 전상국(소설가), 김동식(문학평론가,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수상소감
저 개인에게도 물론 영광이지만, 과학소설이 김유정문학상을 받는 장면 또한 몹시 뜻 깊은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이 소설은 아마도 쥘 베른 스타일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사변소설의 모범을 창조했으나 과학기술 측면에서는 큰 틀의 내적논리를 준수하는 데 그친 허버트 웰즈에 비해, 쥘 베른은 구체적으로 실현가능한 메커니즘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때문에 실제로 우리 삶의 일부가 된 것은 웰즈의 우주전쟁이나 타임머신이나 투명인간이 아니라 베른의 달나라 여행, 해저 탐험, 80일간의 세계일주입니다.
후대의 작가로서, 당연하게도 저는 둘의 장점을 모두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거듭될수록 한 이야기 안에 이 두 거인을 병치한다는 게 지나친 욕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이쪽이든 저쪽이든 하나 골라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충실한 소개가 아니라 그로써 야기되는 어떤 의미심장한 사건이라고 늘 생각해왔던 터여서, 고지식한 베른보다 몽상가인 웰즈의 방식을 두세 배는 따뜻하게 만지작거렸습니다.
하지만 끝내 웰즈만큼 대범해질 수 없었습니다.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단계마다 저는 그것이 정말 가능한지 고민하고 확인하느라 신경질을 부렸고, 그러는 동안 이 소설에 담겼어야 할 낭만의 상당량을 분실하고 말았습니다. 쥘 베른이 보다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았던 바로 그 좌뇌의 유령에게 저 역시 발목을 잡혔던 것입니다.
게다가 현재의 과학 수준은 쥘 베른 시대의 과학 수준보다 훨씬 전문적이고 복잡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외삽한 미래의 모습도 쥘 베른이 상상한 미래의 모습보다 훨씬 전문적이고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오늘날 과학소설이 사건의 발생가능성을 정직하게 설득하려면 독자를 좀 고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책을 한 권이라도 더 팔아야 할 제 입장에서는 꽤 난처한 일입니다.
그래도 이대로 열심히 가다보면, 언젠가는 두 선배 사이에서 그럴듯한 접점을 찾아내리라고 별 근거 없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때 이 상을 한 번 더 주시면 고맙게 받겠습니다.
2016년 여름
박형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