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제14회 김유정문학상 심사경위
2019년 7월부터 2020년 6월까지 발표된 중단편 소설을 대상으로 한 김유정문학상이 어느덧 14번째에 이르렀다. 이번 심사는 8월 2일까지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문학평론가 김경수, 신수정, 정홍수 선생이 5편의 소설을 추천하고 여기에 심사위원장을 맡은 소설가 이승우 선생이 다시 2편을 더 추가하여 본심을 진행하기로 했다. 8월 20일 심사위원들은 추천작품 가운데 중복된 작품을 제외한 총 15편의 작품들 가운데 7편의 작품을 후보작으로 추렸다. 김혜진의 「3구역, 1구역」, 박민정의 「신세이다이 가옥」, 박솔뫼의 「영화를 보다가 극장을 사버림」, 임솔아의 「그만두는 사람들」, 장류진의 「연수」, 정지아의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조경란의 「가정 사정」 등이 후보작에 올랐다. 8월 27일 수상작을 결정하는 회의가 열렸다. 심사위원들은 후보작을 둘러싼 최근 작품들의 경향에 대한 오랜 논의 끝에 정지아의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를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제 나름의 개성을 자랑하는 다양한 작품들 가운데 어느 한 편을 특정한다는 것은 늘 그렇듯 쉽지 않을 일이었으나 생의 이면을 성숙하게 감싸 안는 수상작의 깊이 있는 시선에 심사위원들 전원은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상자에게 축하를 전한다.
- 심사위원 : 이승우, 김경수, 정홍수, 신수정
2020 제14회 김유정문학상 심사평
인생의 ‘어쩔 수 없음’
이승우 (소설가)
‘사람의 복잡한 심사라고는 눈곱만큼도 모르는, 좋게 말하면 천진난만, 나쁘게 말하면 바보천치 같은’ 한 인물의 평탄하지 않은 삶을 그리고 있는 정지아의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는 상대적으로 커진 작가의 악력이 지배하는 듯한 최근의 소설이 놓치고 있는 서사의 힘을 보여준다. 왜소해진 인물과 쪼가리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이 소설은 현실의 사람 이야기, 이른바 인생 서사를 펼쳐 보임으로써 소설 본래의 자리를 상기하게 한다. 몇 개의 에피소드만을 가지고 한 인물의 전 생을 보여주는 솜씨가 능숙하고, 한 개인의 삶이 역사와 사회라는 힘 센 요소들에 의해 조형된다는 사실을 티 내지 않고 말하는 화법이 탁월하다.
그러나 이 소설이 진짜로 겨냥하고 있는 것이 인생의 어쩔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을 독서 도중 깨달을 때 작가의 솜씨에 대한 헤아림은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만다. 함부로 규정하거나 무엇으로도 납득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의 맨몸의 삶이 육박해 와 먹먹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꾸며낸 이야기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어떤 공교한 기술로도 삶의 진면목은 표현되지 않는다. 제법 냉정한 독자에 속한다고 자부하는 나는 심사자의 신분을 잃고, 흔들리지 않는 균형을 마지막까지 유지하며 충실한 해설자의 역할을 다하는 화자의 냉정함에 화를 낼 뻔 했다. ‘술 하나를 맘대로 못해? 그게 사람이야?’하고 말하는 화자 ‘나’의 ‘이성의 말’보다 ‘사는 거이 맘대로 된다디야?’하고 말하는 ‘엄마’의 ‘인생의 말’에 일찌감치 이입해 버려 생긴 현상이다. 위암 환자에 알콜중독자인 기택은 온 세상이 시커매서, 그 시커먼 것이 목을 조르는 것 같아서 잠을 자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술을 마신다고, 술을 마시면 잠들 수 있다고. 사리분별력 뛰어난 화자는 그것이 알콜중독에 의한 섬망 증상이라고 충실하게 해설한다. 손색 없는, 냉정한 이 코멘트로 인해 기택의 비극은 한층 고양된다. 술을 마셔서 세상이 새까매진 것이 아니라 세상이 새까매서, ‘세상이 새까만 허방’이어서 술을 마신 것이 진실 아닌가. 그래서 질문이 생긴다. 세상이 새까만 허방일 때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화자가 아니라 인물 편을 들기 시작했으니 제대로 심사하기는 틀린 셈이다. 다른 심사자들이 이 작품의 훌륭함을 요령 있게 설명해주어서 다행이다. 나는 그분들의 선택에 이의를 달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작가는,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하고 묻는다. 이 의문형은 우선은 한 인물의 삶에 대한 타인의 앎/모름의 문제를 겨냥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각자의 삶에 대한 자신의 앎/모름을 향한다. 이 소설을 ‘인생 서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특별한, 특별히 불행한 한 개인의 삶을 우리에게 구경시키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음’과 ‘어쩔 수 없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을 똑바로 보게 하기 때문이다. ‘알 수 없음’은 ‘어쩔 수 없음’과 한 짝이다.
소설은 눈앞의 새까만 어둠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기택에게서 빛을 보는 것으로 끝나지만, 이미 비극적 인물에 깊이 이입해 버린 독자는 그 암시적이고 막연한 문장으로부터 어떤 위안도 받지 못한다. 아니, 위안은, 대부분의 좋은 소설이 그런 것처럼, 이 소설의 임무가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은 인생의 ‘어쩔 수 없음’이라는 익숙한, 굳은 명제를 생생한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낯설게 살려낸다. 정서적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반박 같은 질문이 새로 생기고, 쉬 사라지지 않는다.
김경수 (문학평론가. 서강대 교수)
정지아의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는 단편소설이 어때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수작이다. 정지아의 소설은 소설이 복합적인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강요하는 장르가 아니라 몇몇 풍경을 통해 은근슬쩍 말을 건네는 장르라는 점을 실증하고 있다. 이 소설은 어릴 적 어떤 사건으로 아버지와 마을사람들이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장면을 목도한 아들의 허망한 삶과, 그런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으나 다시금 현실의 질서에 순응하지 못하고 술의 힘을 빌려 살다가 병든 아들의 운명 같은 삶을, 사촌누이의 따스한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작품에서 그 역사적 사건은 명시적으로 말해지지는 않으나, 이야기의 배경과 인물들의 방언으로 미루어보면 짐작이 가능한 사건이긴 하다. 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명확히 말해주지 않는데, 그것은 그런 역사적 배경을 삭제하더라도, 이 작품이 전하는바 역사적 상처를 제 몫으로 안고 견디듯 살아가야 하는 한국인 일반의 운명의 조건에 대한 관찰이랄까 연민이 선명히 전달되고 확장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현재 활동하는 작가 가운데 한 개인의 삶이 그가 속한 가족의 운명으로부터, 그리고 가족이 살았던 시대적 상처로부터 결코 멀리 달아날 수 없다는 것을 중층적으로 보여주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쉬 볼 수 없는 이런 시선은 모르긴 해도 작가 자신의 연배와도 무관하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지아는 드러내놓고 그런 경험에 어떤 가중치를 두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지아는 젊은 독자들도 친숙할 현실의 세부를 그려내면서 그런 현실의 배면에 놓인 가족과 같은 공동체의 삶의 역사를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개인적 성정 탓이든 시대적 환경 탓이든, 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허방을 짚어내고 그것에 적절한 표현을 주는 일은 소설적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며, 나아가 그것을 치유할 가능성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힘겨운 과정을 그리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데, 이 작품에서 정지아는 그런 작업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고 있다. 특히 소설의 결말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풍경 속에 자신이 담고자 하는 주제를 무리없이 담아내고, 나아가 그 속으로 독자마저도 유인하는 힘을 지닌 풍경을 축조하는 정지아만의 작법은 남다르다. 이 소설의 결말에서 그려지는 복합적인 풍경만 보아도 그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결말의 힘에 대해서는 김유정 또한 남다른 경지를 개척했던 작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점에서 정지아의 김유정 문학상 수상은 아주 적절해보인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근자에 와서는 많이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이번 김유정문학상 심사 과정 역시 한국 소설에 거세게 일고 있는 여성 서사의 흐름을 새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일견 시효를 다한 채 거의 마지막 숨을 이어가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지속된 장구한 시간만큼이나 끈질기게 우리 삶의 온갖 부면에 깊게 뿌리내린 채 변형/재생산되고 있는 남성 중심 가부장제의 부정적 현실과 문화는 지금 이곳 한국인의 이야기를 규정하고 형성하는 가장 강력한 서사소가 되고 있다. 좀 더 정확히 ‘가부장제 비판’은 최근 한국 소설이 재현하고 구성하는 사회성의 국면, 정치성의 지점을 그것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고 있다. 어쨌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지금 여러 차원에서 꽤 큰 전환의 문턱에 있다는 느낌은 분명하며, 고통과 차별, 가려지고 지워진 시간을 새롭게 증언하고 발견하면서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구축하고 그려보는 일은 한국 소설의 강렬한 현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이 문학이고 소설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언제든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뒤얽힌 우리네 삶의 시간에 대한 생생한 응시와 성찰에서 일어나는 언어의 창조여야 할 테다. 또한 그럴수록 자명해 보이는 이야기의 시선과 목소리까지 다시 질문에 부치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소설이, 혹은 소설 쓰기가 세상의 중요한 작동에서 비켜 있고 무심하게 일어났다 사라지는 많은 일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 반드시 우리를 기운 빠지게 하는 것만은 아니리라.
이번 심사 과정에서 만난 많은 작품들은 바로 그 언어의 찰지고 개성적인 창조를 통해 전환과 지속의 현실이 교차하는 모순과 혼돈의 시간을 다채롭게 드러내주고 있었다. 화자 장치를 어떻게 활용하든 대체로 두드러지는 내포작가-일인칭의 목소리는 이들 작품이 담아내고 있는 뜨겁고 절실한 진정성의 자리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러니까, 끊고 싶고 넘어서고 싶은 앞 세대 여성들로부터 흘러나오는 불편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응원과 연대를 조용히 끌어안는 시선이 있고(마음과 감정의 정확한 분할의 언어가 그것을 가능케 했으리라), 재개발지역의 메마른 시간을 배경으로 버려진 고양이들과 두 여성의 이야기를 감싸고 있는 아직 일어나지 않고 말해지지 않은 것들의 희미하지만 절실한 환기의 언어들이 있고, 차가운 세상의 풍경에 한 가족의 시련을 섬세하게 교직하면서 끝내는 ‘고독’이라는 작가 고유의 인간 이해로 우리를 데려가는 이야기가 있고, 여백을 환기하는 주밀하고 세련된 화법 속에 적산가옥이라는 특별한 장소에서 발굴해내는 ‘여성혐오’의 뼈아픈 이야기가 있으며, 프레임 바깥에 놓인 세대의 시선과 감각으로 연신 우회하고 겉돌면서도 지나간 역사와 시간을 현재라는 또 다른 감당하기 힘든 지평 안에서 숙고하는 이상한 리듬으로 살아 있는 언어들이 있고, 탈주와 고립의 이미지를 쌓아가는 가운데 떠나고 그만둘 수밖에 없는 어떤 이들의 이야기(어쩌면 한국 소설에는 처음 도착한 시간과 경험일 수 있다)―그 ‘얼음의 언저리’를 걷는 듯한 시간과 그들 사이의 막막한 연결에 대해 말해보려는 이야기가 있었다.
2020년 제14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된 정지아의 단편소설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는 함께 읽은 작품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많은 부정적 풍문과는 달리 지금 우리에게 소설이라는 오래되고 특별한 이야기의 형식이 여전히 필요하고 절실하다는 것을 가슴 벅차게 느끼게 해준다. 이 소설에서 아버지와 아들, 한 부자 세대를 끝내 무너뜨리는 ‘검은 허방’은 역사적 상처의 특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신산한 삶의 이야기들 안에서 사촌 택이와 ‘짝은어매’ 사이에만 주고받음, 서로를 살게 하는 힘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역사를 포함해 그 몹쓸 가부장제의 폭력과 그늘을 가장 많이 감당해야 한 것은 큰어매와 짝은어매, 그리고 소설 화자 ‘나’와 같은 여성들일 테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누군가는 누군가를 살게 하고 버티게 만든다. 그런 주고받음이 반드시 공평하게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응시하는 소설의 시선은 서늘하고 아프기까지 하다. 일견 선명하게 보이는 듯하나 정작 안으로 들어가면 뭉뚱그려지고 막막해지기만 하는 사람살이의 경계를 생생하고 끈덕진 입말의 현장성으로 부조하면서 정지아의 소설은 역사나 이념의 기호가 실체화할 수 없는 삶의 흐릿한 실루엣 앞으로 끝내 우리를 데려간다. 화자가 사촌 택이에게서 키를 빼앗아 반쪽 유령이 된 그이를 차에 태우고 가는 소설의 마지막은 내가 최근에 읽은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이다. 그러나 그렇게 허청허청 집으로 걸어가는 택이에게도 한낮의 햇볕이 내리쬐고, 망연히 주저앉은 화자에게도 반쯤 죽은 팽나무의 그늘이 드리우는 것이 세상의 무심함이라면, 정말 우리는 어디까지 알 수 있는 걸까. 그러나 우리는 이게 흔한 ‘불가지론’으로의 퇴행이 아니라는 걸 안다. 앎과 모름의 경계는 매번 우리가 우리의 삶을 내어주면서 묻지 않으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소설이 그 막막하고 필사적인 질문의 한 방식이라는 걸 정지아의 소설은 묵직한 감동 속에 입증하고 있다. 그래, 정말 우리는 어디까지,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수상을 축하한다.
신수정 (문학평론가, 명지대 교수)
김혜진의 「3구역, 1구역」은 재개발이 진행된 구역과 그렇지 않은 구역을 배경으로 길고양이를 돌보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펼쳐놓음으로써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첨예한 이슈라고 할 수 있는 계급과 젠더가 상호교차하는 지점을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사회성 짙은 테마를 내면화하는 정교한 디테일과 어느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 다양한 이해관계의 선들에 관한 소설화 과정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박민정의 「신세이다이 가옥」은 입양아의 귀환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이 입양이 가계의 종속을 도모하는 여성(할머니)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그간의 남성주도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과 결을 달리함과 동시에 가부장제가 여성을 공모자로 끌어들이는 지점을 예리하게 드러내고 있어 문제적이었다. 이 작가 특유의 취재에 근거한 방법론이 서울의 공간지지학과 맞물려 후암동의 적산가옥을 한국 사회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로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가외의 소득으로 여겨진다.
박솔뫼의 「영화를 보다가 극장을 사버림」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표면적으로는 이 작가의 ‘광주’ 연작의 하나로 보이지만 이 소설에는 그간의 작품들과 구별되는 어떤 진전의 기미가 두드러져 보인다. 이를테면 그간의 소설이 ‘영화’(작품)에 치중하고 있었다면, 이번 소설은 영화가 아니라 ‘극장’(삶)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고 할까. 세월이 흘러 어떤 일의 ‘사건성’ 자체가 또 다른 맥락을 형성할 때, 우리는 그때에서야 비로소 그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지로 모르겠다. ‘광주’가 어느덧 그런 시간을 획득했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별일 아닌 것처럼 불현듯 상기시킨다. 임솔아의 「그만두는 사람들」은 시간의 불가역성을 자의적으로 끊어버린 자들의 이야기다.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무리로부터 이탈해 홀로 섬을 찾은 화자가 들려주는 노루섬의 노루 이야기나 사비나가든의 일화에서 드러나듯 이 소설은 시적 여운에 힘입어 ‘지속’ 대신 ‘단절’을 이야기하는 발상의 전환이 대단하다. 젊은 작가의 패기가 아니고서는 포착하기 어려운 대목 같다.
장류진의 「연수」는 운전시험 낙방을 유일한 인생 실패담으로 꼽고 있는 엘리트 여성이 운전 연수 강사와의 만남을 통해 운전 혹은 삶에 대한 공포와 긴장을 극복하는 이야기다. 요약하고 보면 하나의 일회적 사건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 이 소설은 연수 과정의 구체성과 디테일에 관한 적절하고 위트 넘치는 완급조절이 일품이다. 이 작가는 새로운 형태의 모녀 서사, 예컨대 시니어와 주니어 여성 사이의 미묘한 입장 차이를 넘어서는 연대의 가능성을 가장 남성적인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는 ‘운전 연수’를 통해 반어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조경란의 「가정 사정」을 기쁘게 읽었다. 오랜만에 발표작을 읽기도 했거니와 ‘봉천동’ 시리즈를 잇는 가족 이야기,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 설정이 인상적이었다. 옷 수선 과정을 소설 쓰기의 문제로 치환하는 과정의 노련함과 절절함이 심금을 울리는 가운데 딸과 서먹한 관계를 유지하던 아버지의 일상이 ‘가정 사정’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딸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결말 부분은 이 작가의 녹슬지 않는 소설적 관심사를 확인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2020년 14번째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된 정지아의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의 주인공은 작가와 거의 등신대로 등장하는 화자의 사촌 ‘기택’이다. 삶에 대한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가 이런저런 삶의 고비를 지나 위암 수술을 받고도 술을 끊지 않은 채 여전히 알 수 없는 운명의 ‘허방’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장면을 포착하고 있는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말의 의미 그대로 ‘진짜’로 보인다. 기택의 선택을 나무라고 삶의 방향으로 돌려놓고자 애쓰는 화자에게 “사는 거이 다 맘대로 된다디야?”라고 일갈하는 어머니, 즉 기택의 ‘쩍은 어매’의 목소리는 근자에 들어보지 못한 소설 장르 본연의 울림이라고 할 만했다. 어떤 삶은 아닌 줄 알면서도 그것 밖으로 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당신 아버지와 동네 장정 스무 명이 국군 총에 맞아 죽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가계의 내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 소설의 역사적 상상력이 비로소 운명의 단계로 내면화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이 작가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영역 같기도 하다. 수상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