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문인과의 차 한 잔 ② 소설가 전상국
“내게 소설 쓰기는 놀이… 문법 파괴도 놀이였지”
글 :김태완월간조선 기자
⊙ 김유정 생가 맞은편에 건평 165평 2층 규모로 ‘전상국 문학의 뜰’ 건립
⊙ 은사(黃順元) 권유로 김유정과 만나… 김유정문학촌장, 김유정기념사업회 이사장
⊙ “넌 어휘력과 문장이 젬병이다”… 고교 문예반 선생님 한마디가 소설가 길 열어
⊙ 괴롭던 서울살이(중랑구 상봉동)… 《영자의 전성시대》 쓴 趙善作 만나 다시 팬 들어
⊙ 단편 〈동행〉 이후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동족상잔 비극을 소설로
全商國
1940년생. 경희대 국문과, 同 대학원 졸업 / 강원대 명예 교수 /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동행〉이 당선되어 등단. 작품집으로 《바람난 마을》 《하늘 아래 그 자리》 《아베의 가족》 《우상의 눈물》 등과 장편소설 《늪에서는 바람이》 《불타는 산》 《길》 《유정의 사랑》 등이 있다. /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대한민국문학상, 동인문학상, 윤동주문학상, 김유정문학상, 한국문학상, 후광문학상, 이상문학특별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이 있다.
지난 3월 4일 강원도 춘천의 김유정문학촌에서 전상국 교수를 만났다.
“내가 평생 즐겨 쓴 소설은 물론 이 시대 우리나라 작가·시인들이 남긴 소설과 시들을 가볍게 만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생각한 겁니다. 책은 안 팔리지만 신명(身命)을 다해 글을 쓴, 한국 문학에 이런 작가·시인들이 있다는 걸 알리는 데 목적이 있어요.”
“작가·시인들의 사인이 든 책들이어서 방문객들이 책을 펴는 순간의 느낌이 남다를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전상국 문학의 뜰’
― 1층에는 소설가 전상국의 모든 것이 전시되겠네요.
“어느 날 김유정에 미쳐 사는 내게 아내(김옥자 여사)가 말했어요. ‘김유정 작가는 좋겠다. 젊어서 죽었는데 당신 같은 자식이 있어서’라고. 김유정 작품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조상 기일(忌日)마저 까마득히 잊고 있는 내가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어요.”
그래서 ‘문학의 뜰’을 구상하게 됐단다. “죽은 뒤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 부족한 대로 정리하고 매기는 자기 검증, 자기 인증의 본때로 삼으면 어떠냐는 아내의 뜻이 간곡했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내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데 누가 내 것을 좋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했다.
전상국과 김유정은 강원도 출신이란 공통점 외에 《조선일보》 신춘문예(각각 1935년, 1963년)를 통해 등단한 이력도 같다. 전상국은 또 1990년 제1회 김유정문학상을 받았다는 인연도 있다.
김유정은 강원도 춘천군 신남면(현 춘천시 신동면) 증리 실레마을 태생이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에 입학해 현대식 교육을 받다 제적당해 귀향했을 때가 스물두 살(1930년)이었다. 연상의 기생 박록주(朴綠珠·1906~1979)를 향한 연정(戀情)을 이루지 못한 한(恨)에다 몇천 석 집안의 몰락까지 겹친 상황에서의 낙향이었다.
김유정은 고향의 자연 속에서 일제강점기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이들의 생활을 담 너머로 넌지시 바라보는 일로 위안을 삼았다. 그네들 이야기가 소설 〈동백꽃〉 〈봄·봄〉이 되었다.
전상국은 경희대 대학원 시절, 은사인 황순원(黃順元·1915~2000)의 권유로 동향의 김유정과 만났다. 그것이 김유정과의 첫 인연, 평생 함께할 필연이 되었다.
1963년 신춘문예 당선작인 〈동행〉은 전상국 교수의 처녀작이다. 작품 구상은
그 구두를 신고 그해 겨울방학 고향에 내려갔고 고등학교 때 문학 서클을 함께하던 친구들을 만났다. 술김에 선배가 사는 춘천 근교의 장학리라는 시골 마을을 찾아가는데 폭설이 내린 그 밤, 길을 잃어버려 생눈길을 헤매야 했다. 야산 눈길을 엎치락뒤치락 넘던 그 즐거움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뭔가 그 눈길을 배경으로 그럴싸한 얘기를 하나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다분히 감상적인 톤을 갖게 될 것이고 좀 더 서구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이야기면 더 좋았어요.”
당시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그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6·25 전후의 상황을 통해 자신의 머리에 각인된 몇 개의 사건이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과정의 어른들 눈에 서렸던 그 살기(殺氣)를 본 사건들이었다.
“그래, 동족상잔의 그 비인간적 싸움을 모티브로 하되 6·25 이야기 그 이상의 어떤 인생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하자!”
전상국의 수필집 《우리가 보는 마지막 풍경》(2010)에는 〈동행〉을 구상한 이야기가 담담히 실려 있다. 인용하면 이렇다.
〈… 좀 더 극적이고 긴장감 있는 이야기면 더 좋겠지. 춘천에서 살인사건이 생기고 그 살인범이 눈 내리는 밤, 자기 고향을 찾아간다. 그는 6·25 때 부역자로 10년 징역을 마치고 나온 날 범행을 한 것이다. 그 범인을 잡기 위해 폐병 3기인 형사가 역시 그 눈길에 나서고 두 사람은 드디어 동행하게 된다.
길을 함께 가고 있기도 하지만 살인범은 아버지 무덤에서 자신의 기구한 삶을 마감하러 가는 것이고 그 형사 역시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마지막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두 사람의 동행이 인간적 화해로 결말을 맺는 그런 감동적 이야기….〉(239쪽)
여기까지 생각에 이르자 흥분하기 시작했다. 원고지 70장 정도의 작품을 써서 은사인 황순원 선생님한테 불쑥 내밀었다. 대학 2학년 2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동행〉은 이후 내 작품이 만들어지는 하나의 등식이 되어버렸어요. 주인공이 고향을 찾아가는 귀소(歸巢) 의지라든가 6·25 얘기를 다루되 반드시 오늘의 현실과 혹은 인생의 어떤 문제와 결부시키자는 작가의 의도 같은 것이지.
어떻든 〈동행〉은 내 출세작이고 처녀작입니다. 또 아직도 내 작품의 중심 모티브이며, 내 소설 구성의 등식으로 작용하고 있어요. 지금도 소설을 구상하기 위해 눈을 감으면 〈동행〉 속 그 밤 눈길을 걸어가는 두 사내의 발 소리가 들립니다.”